이탈리아 경제 위기: 재정중독과 해묵은 지역격차의 덫





이탈리아 경제 위기: 재정중독과 해묵은 지역격차의 덫

이탈리아 경제 위기: 재정중독과 해묵은 지역격차의 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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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소르파소(Il sorpasso)’. 이탈리아어로 ‘추월’을 뜻하는 이 단어는 1989년, 이탈리아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영국을 앞질렀을 때 유럽 전역에서 회자되며 이탈리아의 경제적 위상을 상징했습니다. 한때 영국을 능가할 정도의 강력한 경제력을 자랑했던 이탈리아는 주요 7개국(G7) 중 하나이자 유럽연합(EU)에서 세 번째로 큰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입니다. 명목 GDP는 세계 8위에 달하며, 발렌티노, 보테가 베네타, 펜디 같은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와 페라리, 람보르기니 같은 최고급 자동차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핀칸티에리(조선), 레오나르도(방위산업), 에니(에너지), 에넬(재생에너지) 등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제조 기업들도 이탈리아 국적입니다.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나폴리, 아말피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 도시들은 매년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이탈리아지만, 현재는 심각한 장기 침체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2023년부터 현재까지 연간 경제성장률이 0%대에 머무는 고통을 겪고 있으며, 이는 과거의 영광과는 대조적인 암울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이탈리아 경제를 옥죄는 주요 원인으로는 크게 두 가지, 바로 ‘재정중독’과 ‘지역격차’가 지목됩니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이탈리아의 미래 혁신과 지속 가능한 성장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재정중독의 덫: 미래를 담보로 한 현재의 안일함

재정중독의 덫: 미래를 담보로 한 현재의 안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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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가 빠진 첫 번째 함정은 바로 ‘재정중독’입니다. 지난 1분기 기준으로 이탈리아의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은 136.8%로, 유럽연합 내에서 그리스(152.9%) 다음으로 높은 수준입니다. 이러한 막대한 국가 부채는 이탈리아 경제에 치명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국가 재정의 상당 부분이 부채의 이자를 갚는 데 사용되면서, 정작 미래 성장을 위한 핵심적인 투자, 예를 들어 연구개발(R&D) 투자 등이 심각하게 제약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유럽연합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이탈리아의 GDP 대비 R&D 투자 비중은 1.3%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독일(3.1%)을 비롯한 유럽 주요국은 물론, 유럽연합(EU) 평균(2.2%)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치입니다. 혁신과 기술 발전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 되는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R&D 투자 부족은 이탈리아의 장기적인 성장 잠재력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요인입니다. 재정중독은 단순히 돈을 많이 쓰는 문제를 넘어, 국가의 미래를 위한 투자를 막아 경제 활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포퓰리즘 정책이 낳은 재정 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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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막대한 재정적자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11년까지 장기 집권했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포퓰리즘 정책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조세 기반이 약화되고 사회복지 지출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서도,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법인세와 소득세를 낮추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시급한 연금제도 개혁이 필요했지만, 오히려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연금 수급 조건을 완화하는 역행적인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러한 정책들은 단기적인 인기를 얻었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 국가 재정을 돌이킬 수 없는 수렁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이후 마리오 몬티 전 총리, 마테오 렌치 전 총리 등 여러 정부가 뒤늦게 긴축정책과 노동시장 개혁에 나섰지만, 이미 너무 커져 버린 국가부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과거의 잘못된 재정 운용이 현재 이탈리아 경제 위기의 주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묵은 지역격차: 남과 북, 두 개의 이탈리아

해묵은 지역격차: 남과 북, 두 개의 이탈리아

이탈리아 경제의 발목을 잡는 또 다른 해묵은 문제는 바로 ‘남북 간 경제·사회적 격차’입니다. 이는 단순한 지역 간 불균형을 넘어, 국가 전체의 성장 동력을 약화시키는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이탈리아는 지리적으로 크게 북부와 남부로 나뉘는데, 이 두 지역의 경제적 활력과 사회적 특성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롬바르디아(밀라노), 피에몬테(토리노), 에밀리아로마냐(볼로냐·파르마), 베네토(베네치아·베로나) 등 북부 지역에서는 역내총생산 대비 R&D 비중이 독일이나 네덜란드와 비슷한 3%대에 달합니다. 이는 북부 이탈리아가 유럽의 주요 경제 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혁신에 투자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반면, 최남부 칼라브리아 지역의 R&D 비중은 0%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러한 극심한 R&D 투자 격차는 북부와 남부 간의 산업 구조, 기술 수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경제적 번영의 차이를 심화시키는 핵심 요인입니다.

인구 이동을 촉발하는 지역 불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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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격차는 인구 구조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지난해 이탈리아 북부 지역의 인구는 국내 이주와 해외 이민의 유입에 힘입어 전년 대비 1.6% 증가했습니다. 이는 북부 지역이 여전히 경제적 기회와 더 나은 삶의 질을 제공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남부 및 도서 지역의 인구는 같은 기간 3.8%나 쪼그라들었습니다. 젊은 인구와 노동력이 경제적 기회를 찾아 북부로 이동하면서, 남부 지역은 더욱 활력을 잃고 쇠퇴하는 악순환에 빠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구 유출은 남부 지역의 경제 활력을 더욱 저해하고, 지역 소멸의 위기감마저 고조시키는 심각한 사회 문제입니다.

사회적 자본이 가른 운명: 로버트 퍼트넘의 통찰

전문가들은 이탈리아 남북 격차의 근본적인 원인을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 축적의 차이에서 찾고 있습니다. 로버트 퍼트넘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명예교수는 그의 저서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과 ‘이탈리아 민주주의의 성과(Making Democracy Work)’에서 이탈리아의 사례를 심층적으로 분석했습니다. 퍼트넘 교수는 “북부 이탈리아의 높은 경제적 성공은 시민들의 신뢰와 협력에 기반한 높은 사회적 자본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습니다.

북부 지역의 높은 사회적 자본은 시민들 간의 상호 신뢰, 강력한 시민 참여, 그리고 효율적인 공공 기관 운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기업 간의 활발한 협력과 정부 정책의 효율적인 집행이라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으며, 결과적으로 경제적 번영을 촉진했습니다. 반면, 남부 지역의 낮은 사회적 자본은 불신과 비협력적인 태도를 낳았습니다. 낮은 신뢰도는 기업 간의 협력을 어렵게 하고, 정부 정책의 비효율적인 집행을 야기하며, 결국 경제적 퇴보를 가속화하는 원인이 됩니다. 이러한 사회적 자본의 차이는 단순한 경제적 지표를 넘어, 문화적, 역사적 배경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해결하기 매우 어려운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이탈리아의 미래와 과제: 위기 극복을 위한 노력

이탈리아의 미래와 과제: 위기 극복을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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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는 이러한 심각한 경제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이탈리아 정부는 내년도 재정적자 규모를 EU 기준선인 GDP의 3%를 밑도는 2.8%까지 낮추기로 했습니다. 3일 안사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이탈리아 경제재정부는 성명을 통해 “정부는 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을 2025년 3.3%, 2026년 2.8%로 줄이겠다”며 “EU의 ‘초과 재정적자 시정절차(EDP)’에서 졸업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는 EU의 재정 규율을 준수하고 국제사회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려는 중요한 시도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단순히 재정적자 비율을 낮추는 것만으로는 이탈리아 경제 위기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재정중독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재정 개혁과 함께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R&D 투자를 확대하는 구조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해묵은 남북 지역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남부 지역에 대한 전략적인 인프라 투자, 교육 및 인적 자원 개발,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적 자본을 증진시키기 위한 시민 사회의 참여와 신뢰 회복 노력이 절실합니다.

이탈리아는 한때 ‘추월’을 의미하는 ‘일 소르파소’를 외치며 유럽 경제를 선도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는 현재의 재정중독과 지역격차라는 두 가지 큰 난관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는 단기적인 정책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장기적이고 일관된 개혁 의지와 사회 전체의 협력이 필요한 과제입니다. 이탈리아가 직면한 이 복합적인 경제 위기를 성공적으로 헤쳐나가, 다시 한번 유럽의 선두 주자로서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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